애나벨 청, 역사상 가장 공격적이었던 女배우

[형석-성철의 에로&마초]

김형석 / 입력 : 2009.04.27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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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애너벨 청이라는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 건, 2000년 <애나벨 청 스토리>(99. 사진)라는 영화가 한국에 개봉했을 때였다. 한 포르노 여배우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당시 한국의 영화업자들에 의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으로 수입되었고, 화제만 일으킨 채 별 성과 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 영화의 중심은 251명의 남자와 섹스를 벌이는 애나벨 청의 이벤트. 이 과정을 담은 포르노 다큐멘터리가 바로 <지상 최대의 갱뱅>(95)이다.

2000년에 은퇴했으니 그녀가 포르노와 인연을 끊은 지도 10년 가까이 되지만, 한때 ‘애나벨 청’은 미국 포르노계에서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이름이었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중국계였던 그녀는, 포르노 배우가 되기엔 조금은 부족한 조건의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163센티미터의 키에, 글래머와 거리가 먼 몸매. 하지만 10대와 대학 시절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다.


엄격하고 보수적인 싱가포르 사회에서 자란 그녀는, 13세에 첫 경험을 했고 이후 고등학교 시절 갖가지 성적 체험을 한다. 이후 영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어느 날 밤 여섯 명의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했고, 그녀는 ‘여성의 육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영국에서의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간 애나벨 청이 선택한 학문은 여성학. 이곳에서 미셀 푸코의 이론에 심취했던 그녀는, 22세에 포르노 배우가 된다.

‘페미니스트 포르노 여배우’가 어불성설처럼 보이지만, 애나벨 청은 포르노 속에서 공격적이며 적극적인 ‘섹스 주도자’로서 군림하길 원했다. “나는 단지 내 몸을 즐겼을 뿐”이라는 그녀의 신념은, 포르노 배우로 활동했던 6년의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다.

실제 섹스를 보여주는 것이 포르노라고는 하지만, 애나벨 청은 그중에서도 ‘하드 컨셉트’에 속했다. 이것은 서양의 여배우들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신체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데뷔하자마자 그녀가 인기를 끌었던 섹스 아이템은 이른바 ‘이중 삽입’. 일반적인 섹스를 하면서 애널 섹스를 동시에 하는, 조금은 무지막지한 컨셉트였다(그러면서 그녀는 세 번째 남자 배우에게 오럴 섹스를 해준다). 이 컨셉트가 인기를 끌자, 그녀는 이른바 ‘갱뱅’(Gang Bang)으로 옮겨간다. 갱뱅은 ‘윤간’ 혹은 ‘난교’를 뜻하는 말. <팀 전원과 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94)나 <애널 퀸>(94) 등이 당시의 영화들이었다.


1995년, 그녀는 거대한 갱뱅 이벤트를 연다. 지원자들을 선별해 수많은 사람들과 그녀가 섹스를 벌이는 그 이벤트는, 지원자가 사정을 해야 된다는 룰 속에 진행되었고, 10시간 동안 251명과 섹스를 나눈 후 끝났다. 아마도 포르노그래피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여배우였을 애나벨 청. 하지만 그녀의 일상을 담은 <애나벨 청 이야기> 속의 그녀는, 당당한 것 같으면서도 에이즈의 공포 앞에서 눈물 흘리는 ‘평범한 여자’이기도 했다. 2000년에 은퇴한 후 웹 디자이너로 활동중이라는 소문이다.

<김형석 월간스크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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